중국, 진정한 친구도, 진정한 적도 없다
아무리 거센 파도도 해변에 이르면 잦아든다. 지금 미중 양국이 일으키는 치열한 경쟁의 파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아직은 이 파도가 잦아 들 때가 아니다. 긴 안목의 전략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의 경쟁이 가치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 경쟁이 전쟁과 파멸을 피하는 길로 통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경쟁이 거칠고 험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름다운 파도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패권 다툼을 피투성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 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적이 없다. 다행히 지금 미중은 어지럽고 혼란스럽지만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계사를 실험 중이다(사실, 미중 군사적 충돌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 우리 인간들은 지나간 세계사의 터널을 뚫고 동서양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역사적 초입에 서 있는 것이다.
미중 양국의 속내를 보자. 바이든 정부의 전략이 미국 지상주의의 지속을 위한 중국 압박이라면, 중국의 과제는 미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다 원화된 세계 질서를 꿈꾸는 경제발전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진정한 적도, 진정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외교의 대전제로 삼은지 오래다. 거기에‘친미나 반미는 전략이 아니다’는 실리 원칙도 들어있다(우리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전략에는, 중국 문명이 그동안 겪은 참혹한 위기에 대한 자기반성과 경각심이 녹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압박 vs 중국의 개방
지난 연말에도, 중국 정부는‘미중 관계를 정상화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심화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치밀하고 거친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중국은 우리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호주 등 서방의 친미 동맹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중시한다. 최근에는 한한령 해제 소식도 들린다.
이들 국가는 최근 30여 년 동안, 대중국 무역 흑자 1, 2, 3위 국가들이며, ‘친미혐중’에 가장 앞장선 국가들이다. 모두 미국과 함께하는 나라들인 동시에, 미중 양국의 눈치를 보는데 이골이 난 나라들이다.
미중 양국이 벌이는 경쟁의 모습은 현란하다. 3연임을 확정한 시진핑은, 중간 선거를 마무리한 바이든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났다. 긴 악수로 회포를 대신한 두 사람은, 그동안 막혔던 양국 간 국방회담, 통상회담, 재무회담을 잇달아 열었다.
천문학적 협력과 치열한 대립으로 얽힌 양국은 수시로 만나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익을 헤아린다(바야흐로 미중 전성시대인 것이다). 다가올 미 대선에서 ‘반중국 쇼’는 더욱 거칠 어질 것이고, 그 사이 때때로 긴장을 조절하며 계산하는 것이다.
바이든을 만난 시진핑은 곧장 사우디로 날아갔다. 그리고 중동 17개국 정상들과 석유 회담을 열면서, 중동 지역에서 중국 시대를 여는 기초 작업에 몰두했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장기 과제인 위안화 직거래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런 시진핑의 행보에 대해, 바이든은 대리전쟁에 앞장 선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초청하여 응수했다. 미 의 회에서 젤렌스키가 ‘미국의 지원이 부족하다’고 외치자, 연신 기립박수로 화답하던 미 의원들이 빵 터졌다. 그 웃음 속에 기축통화국의 위용과 날카로움이 들어있음을 유의할 일이다.
미국, 새로운 기회를 잡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바이든 정부는 나름 커다란 기회를 움켜잡았다. 제각각인 서방을 동맹전략으로 묶는 한편, 러중 압박을 여러 갈래로 착수했다. 한편으로는, 우크라 무기 지원 지속과 러시아 재산 동결, 러시아 은행들의 SWIFT(국제은행간 결제 시스템) 배제 등으로 초강수 제재를 단행하는 한편, 대만해협의 긴장을 국제화하고, ‘칩4동맹’, 반도체 공급망 단절 등으로 옥죈다.
이런 미국의 압박에, 중러 양국은 협력의 가속 페달로 응수한다.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과 발전된 과학기술, 여기에 중국의 시장과 자본이 손을 잡는 것이다. 편협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실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한 시도 양측의 움직임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이 대외의존도가 높디 높은 우리가 할 일이다.
중러, 협력의 구조적 변화
이제 중러 양국의 협력은 그 구조적 틀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다음 공세에 대처하려는 것이다. 먼저, 러시아를 보자. 서구 기업들이 철수하면서 중국과의 무역이 긴요해졌다. 중국 자본과 기업 유치도 중요해졌다. 특히 인 프라와 물류, 5G 기술 협력이 우선이다. 중국과 협력으로 디지털 경제에서 유럽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도 잡았다. 군수 분야에서도 중국과의 협력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양국의 신뢰가 쌓여가는 것이다.
중국 입장은 어떤가? 무엇보다 러시아는 식량과 에너지를 공급받는데 중요하다. 거대하고 비옥한 러시아 땅에 자본과 노동력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천연 가스, 석유 및 광물 등을 놓고도, 양국은, 새로운 글로벌 전략을 착수했다. 인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과 글로벌 협력망 구축을 진행한다. 러시아와의 무역과 투자가 대폭 늘면서, 2022년 양국 무역은 30% 이상 증가했다.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와 함께 강 달러에 대비하는 것이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무제한적인 발권력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달러를 찍어 전세계의 재화를 공짜로 빨아들이는 미국이 강달러로 세계경제로부터의 흡입력을 높이는 것이다. 미국 채권(TB)을 매각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거의 2천억 달러의 미 채권을 매각했지만 미국은 별 손실이 없다. 하지만, 중국이 집중하는 인민폐 디지털화는 다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어서 미국 달러가 주도하는 SWIFT 결재가 필요 없다. 위안화 직거래도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확장 중이다. 러시아 ,인도, 사우디 등과 서서히 '반달러친위안화 동맹'도 다듬어가기 시작한다. 미국이 기분 좋을 일이 아니다.
한광수
현재 (사)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하며 한중관계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밴더빌트 대학 박사과정 수학,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 경제 연구를 시작하여 국제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 외무부 파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방문학자, 베이징대학교 베이징시장경제 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주중한국대사관, 한국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 등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2003~2010), 중국 프로그램 자문(1998~2007), KBS 객원해설위원, 동북아경제학회와 현대중국학회 고문, 비교경제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미중관계의 변화와 한반도의 미래>, <중화경제권시대와 우리의 대응>, <중국의 잠재력과 우리의 대응>, <현대 중국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중요 논문으로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한중 교역협력구조의 변화>, <미중경제협력의 불안정성과 한국경제>, <중국 자본시장 개방의 특성>, <최근 미중 통상관계의 특성>, <중국 정치체제 및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