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시장의 약 40%는 미중 양국의 차지다. 이에 비하면, 다른 열강들의 시장규모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그들은 군사적 긴장과 거대한 상호 투자로 현란한 실리게임을 벌인다. 살벌한 이중 게임이다. 이 게임의 역사적 배경을 따라가 보자. 거기에 제국주의 내부 전쟁인 세계대전이 있다. 우선, 프랑스부터...
시몬 드 보부아르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장 폴 사르트르와는 평생 학문적 동지이자 계약 부부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아침마다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출근했다. 구수한 빵 냄새가 가득한 베이커리 앞을 지날 때면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배고픔을 참기 위해 흐르는 눈물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보부아르 자서전).
이것이 파리 번화가에서 시민들이 직면한 전후의 처참한 현실이었다. 전쟁의 잔혹함은 눈물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으나 패전국과 다름 없었다. 독일의 침략에 이어, 미 공군의 집중 폭격이 겹쳤다. 미 공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의 교량과 철도, 도로를 집중적으로 폭파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화려했던 유럽은 남김없이 황폐한 잿더미로 변했다. 제국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유럽 제국주의가 붕괴되자, 지각 변동이 뒤따랐다. 미국과 중국의 부상이었다. 3류 국가에 불과하던 미국이 세계패권을 거머쥐고, 자본주의를 앞세워 유럽 재건과 냉전을 지휘했다.
참혹했던 중국도 새로운 체제의 깃발을 올렸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1913-45) 중국이 재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열강의 약탈 연합이 비교적 잦아든 것이다. 신해혁명과 신문화운동, 그리고 내전이 불타올랐다(1911-1949). 국민당과 미국을 몰아내고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체제를 내세워 국가를 송두리째 재정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양국 모두 전쟁을 이긴 승전국들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맞붙었다. 이념과 자존심을 걸었다. 중국 해안선 양 끝에 위치한 한국과 베트남에서 그들은 1950년부터 1975년까지 실컷 싸웠다. 이윽고 전쟁에 지친 양국은 화해하며 이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세계 최대의 선진국 시장과 개도국 시장이 절묘한 보완구조로 만난 것이다. 미중시대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한편, 유럽은 잿더미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필요한 것은 전쟁에 대한 반성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또 다른 전쟁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했다.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 ‘상품시장 쟁탈전’의 기본 틀이 문제였다. 이 틀이 바뀌지 않는 한,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을 방법은 막연했다. 그들은 무릎을 맞대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준수할 ‘경제 규칙을 다시 쓰기’로 결단을 내렸다.
새로운 규칙은 곧 ‘해외투자 패턴의 일대 변화’였다. 종래 엄격하게 막아오던 ‘열강 상호 간의 직접투자와 기술이전’의 벽을 허물기로 한 것이다. 이 ‘새로운 규칙 합의’는 전쟁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상호 쟁탈’이 ‘상호 협력’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그들은 비로소 싸우지 않고 해외시장에 손을 잡고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
열강의 상호 투자는 곧 전쟁을 막는 수단이었다. ‘3차 세계대전’을 막을 대안이 나온 것이다! 상대국가에 투자한 자국 기업의 공장을 폭격하는 바보 군대는 없다(한반도 남북한도 이 상호 투자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차단당해왔다. 적대적 분단과 함께 ; 이점은 다음에 별도로 얘기하자).
실제, 전후 선진국 상호간 직접투자는 크게 증가하였고, 종래 대세였던 선후진국간 투자 규모를 훨씬 앞서 나갔다. 투자 성과도 좋았다. 열강은 상호 이윤의 배분과 협력은 늘어나고, 갈등과 대립은 감소한 것을 만족해했다(이는 한 때 유행한 종속이론이 빛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미중화해에 즈음하여 상해 국제문제연구소는 이점을 특히 주목하고 세세하게 분석했다. 중국이 해외투자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상호 투자! 그것으로 서방은 전쟁을 억제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일거양득의 황금알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중국정부가 외국인투자유치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미중 양국이 화해한지 7년이 지나, 개혁개방을 선언하면서 부터였다. 자본주의를 방불케하는 과감한 지원과 인센티브가 뒤따랐다. 그리고 40여년이 흐른 2020년, 마침내 중국은 미국을 누르고 세계 제1위 투자유치국으로 올라섰다. 이 해는 코로나19 판데믹이 휩쓴 해였다.
이와 같이, 미중화해는 종래 불가피하다고 여기던 동서양 간 전쟁의 흐름을 투자의 흐름으로 전환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서, 미중화해 당시 한-미-중 상황을 일별해보자. 거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혹독하고 깜깜한 국내외 환경에 시달렸는지,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 굴레가 무엇인지가 들어있다.
한광수
현재 (사)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하며 한중관계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밴더빌트 대학 박사과정 수학,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 경제 연구를 시작하여 국제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 외무부 파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방문학자, 베이징대학교 베이징시장경제 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주중한국대사관, 한국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 등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2003~2010), 중국 프로그램 자문(1998~2007), KBS 객원해설위원, 동북아경제학회와 현대중국학회 고문, 비교경제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미중관계의 변화와 한반도의 미래>, <중화경제권시대와 우리의 대응>, <중국의 잠재력과 우리의 대응>, <현대 중국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중요 논문으로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한중 교역협력구조의 변화>, <미중경제협력의 불안정성과 한국경제>, <중국 자본시장 개방의 특성>, <최근 미중 통상관계의 특성>, <중국 정치체제 및 외교>